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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펄 끓어 빵처럼 구워진다" 서양인 깜짝 놀란 '온돌의 민족'

기자명 : 시사주간지… 입력시간 : 2020-12-17 (목) 21:55
"이곳 사람들은 밤에는 펄펄 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익숙하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스웨덴 언론인 아손 그렙스트는 『코레아 코레아』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남겼다. 당시 한반도를 찾은 서양인들의 눈에 들어온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온돌문화였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 17일 강연
"조선 후기 온돌이 전역에 보급
좌식 문화, 단층 주택 등 영향"

비슷한 시기  영국인 여성 이사벨라 버드 비숍도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조랑말의 말린 똥까지 때는 여관의 방은 언제나 과도하게 따뜻하다…나는 어느 끔찍한 밤을 방문 앞에 앉은 채로 새운 적이 있는데, 그때 방 안의 온도는 섭씨 39도였다. 지친 몸을 거의 지지다시피 덥혀주는 이 정도의 온도를 한국의 길손은 아주 좋아한다"고 적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 44 ] 전주 교동 한옥마을 장현식 고택 - 김제에서 옮겨져 새로 단장된 장현식 고택. 전주시는 영빈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실내 화장실 등을 설치했다. ㄴ 자형 안채와 ㅡ 자형 중간채로 돼 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 44 ] 전주 교동 한옥마을 장현식 고택 - 김제에서 옮겨져 새로 단장된 장현식 고택. 전주시는 영빈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실내 화장실 등을 설치했다. ㄴ 자형 안채와 ㅡ 자형 중간채로 돼 있다.

 
하지만 온돌이 우리 문화의 상징처럼 자리를 잡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7일 서울대 출판문화원이 주최하는 '저자에게 듣는다' 강연 시리즈에서 "한반도 전역, 모든 계층에게 보급된 것은 조선 후기"라고 설명했다. 20여년간 온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송 교수는 지난해 『한국 온돌의 역사』라는 학술서 펴내기도 했다. 
송 교수에 따르면 옥저에서 시작된 온돌 문화는 고구려를 거쳐 발해에서 발달했고, 이 시기에 여진족 등 만주 일대 북방 민족에게 크게 퍼져 중국 청나라 황실에서도 사용하게 됐다.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온돌 유적을 조사하는 모습 [사진 유튜브 캡쳐]

송기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온돌 유적을 조사하는 모습 [사진 유튜브 캡쳐]

하지만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온돌은 서민층에서만 사용하는 도구였다. 송 교수는 "고구려 벽화에도 온돌은 등장하지 않는다. 환도산성 같은 유적지에도 없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초기엔 국왕이 나무 침상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지배층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침실 생활을 했던 귀족층은 커튼이나 병풍으로 바람을 막고 난로와 화로를 썼기 때문에 온돌이 필요 없었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또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양반들은 온돌에서 자면 몸이 약해지고 뼈도 약해진다고 여겼고, 병자나 노인만 온돌방에서 생활하게 했다"고 덧붙였다.  
반면 서민층이 이를 사용한 건 가성비 때문이었다. 송 교수는 "(연료비가 부족한) 가난한 계층에겐 땅바닥을 데워 방 전체를 덥히는 온돌이 효율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고려 시대 만들어진 청자나 조선 초기 그림을 보면 2층 주택이 나타나지만 점차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도 온돌의 영향이라고 한다.
송 교수는 "온돌은 하중 부담 때문에 2층에 올릴 수 없다. 이 때문에 조선 전기만 해도 있었던 2층 주택이 점차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1층은 습기가 올라오기 때문에 세계 대부분의 문명에서 2층집이 보편적"이라며 "하지만 조선은 온돌을 2층에 올리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온돌을 사용해 습기를 막았기 때문에 2층집을 세우지 않고 살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고구려 무용총에 있는 벽화. 입식생활과 식탁문화를 엿볼 수 있다. [중앙포토]

고구려 무용총에 있는 벽화. 입식생활과 식탁문화를 엿볼 수 있다. [중앙포토]

온돌이 조선 후기부터 널리 퍼진 것은 기후변화가 영향을 끼쳤다.
17세기부터 북반구에 전 세계적인 소빙기(小氷期)가 시작되면서 기온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송 교수는 "조선 후기부터 한랭기로 접어들면서 지구의 온도가 내려갔다. 이것이 온돌이 전 계층으로 퍼지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했다.
온돌이 중국 남부나 일본 등으로 확산하지 않고 한반도와 중국 북부 지역에만 남은 것도 송 교수는 "기후의 요인이다. 일본 등은 한반도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따뜻했기 때문에 굳이 온돌처럼 복잡한 시설을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높은 효율성을 자랑하는 온돌이지만 '선물'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온돌이 한반도 전역에 퍼지면서 땔감의 사용량이 급증했고, 이는 한반도의 산림 남벌로 이어졌다. 
송 교수는 "조선 후기 땔감의 소비량이 늘어나니까 방 크기를 줄였고, 산도 황폐해졌다. 구한말 사진을 보면 서울의 산에 나무가 없다. 민둥산만 남아 홍수에도 취약해지고 농사도 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1960년대부터 산림을 회복한 것도 박정희 정부가 이끈 녹림 사업도 공헌을 했지만 땔감 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전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구한말 광화문 앞 육조 거리. 산이 민둥산이다. [중앙포토]

구한말 광화문 앞 육조 거리. 산이 민둥산이다. [중앙포토]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온돌 문화는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 시대만 해도 입식 문화였던 생활이 좌식 문화로 바뀌었고, 식탁 대신 소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좌식이 익숙해지자 농사일도 앉아서 하면서 호미 같은 작은 농기구가 발달했다. 송 교수는 "돌침대, 찜질방 등 좌식문화는 여전히 현대 문명과 결합해 한국인 특유의 문화를 만들고 있다"며 "이제 한국인은 '백의(白衣)민족'이 아니라 '온돌 민족'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강연은 내년도 정년퇴직을 앞둔 송 교수의 마지막 강연이다. 송 교수는 향후 계획에 대해 "건강이 허락하는 한 3년 안에 발해사 개설서를 펴내고 싶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펄펄 끓어 빵처럼 구워진다" 서양인 깜짝 놀란 '온돌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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